[청량 이윤정] 영덕 장사해변의 뼈아픈 비밀 역사가 세상에 드러나다!

장성각기자 du32@hanmail.net | 기사입력 2019/03/23 [12:02]
▲ 청량 이윤정 시인     ©

학생의 신분으로 시퍼런 바다에서 산 채로 물 먹으며 희생되어 갔던 부분은 최근 세월호에 승선하여 희생 된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세월호의 학생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와서 수학여행을 떠나다가 느닷없는 변을 당하여 우리를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해군 수송함 문산호에 탄 학생들은 부글부글 끓는 우국충정심 가슴에 품고, 배에 올랐다가 영원히 바다에 잠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1997년 3월 6일 장사리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가 한 척의 배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1950년 9월 장사상륙작전의 베일을 벗겨줄 배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우리나라 남북 전쟁이 발발하여 33일 만에 남쪽 국토의 90%를 북한군에게 빼앗기고,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 UN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을 구상하였습니다.

 

인천에서는 9월 15일 밤에 전투를 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성동격서’라는 손자병법의 전술을 차용합니다. 적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양동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동쪽에서 소리쳐 적들의 시선을 동으로 보내놓고, 실제로는 서쪽을 치고 올라가는 전술이 바로 그 전술입니다. 영덕 장사리를 치고 들어가면 적의 시선을 영덕으로 몰아 부산을 치고 들어가려는 길목도 막고, 경기도 인천 지역으로 가는 적군의 병력 유입을 막아서 영덕으로 유인하는 성과를 올리는 것이며, 그 외에도, 적군의 진로를 방해하여 식량 공급을 막고, 아군의 전진로를 개척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장사리 상륙작전을 만들어 낸 것이며, 미국의 전쟁연구 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확률이 5천분의 1로 점치며 만류하던 20세기 마지막 상륙작전입니다.

 
이런 양동작전을 위하여 지역을 영덕 장사리 해변으로 정하였고, 이를 실행 할 것을 미8군에 지시하였으나, 미8군의 병력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를 진행하지 못하자 장사상륙작전 유격대원을 모집하게 됩니다. 1950년 9월 13일 오후 3시경 부산항 제 4부두에 어깨에 총을 둘러 맨 약 800명의 유격대원이 도착합니다. 이들은 놀랍게도 눈에는 우국충정으로 가득 찬 대구와 밀양에 사는 우리의 10대 학생들이었습니다.(학생대원 772명과 학생 외에 56명의 지원요원도 있었습니다). 어려운 나라에 태어나 군번도 없는 학도병으로 어린 나이에 교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15일간 총 쏘는 훈련을(밀양에서 훈련)하고 달려 왔던 장한 우리의 아들들은 대부분은 자진하여 결심하고 달려 온 건아들입니다. 이들은 부모님께 유서를 쓰고, 유품을 남긴 채, 3일치의 식량으로 건빵 한 봉지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지급 되어 받았고, 3일간 버틸 수 있는 총알을 챙겨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도병을 태운 LST 문산호(해군 수송함)는 부산항에서 9월 13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로 출발하였습니다.

 

때마침 파고 3~4m의 심한 태풍이 케지아호란 이름을 달고 갑작스레 문산호에 몰아쳤습니다. 케지아호의 영향으로 배는 침몰하여 1997년 발견 될 때까지 배는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배와 함께 싸워 보지도 못하고 수장되어 버린 학도병이 있었고, 나머지 학도병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서 그 다음날인 14일 새벽 4시 30분에 육지 장사해변에 도착하여 적과의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적군의 총알이 빗발치는 문산호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 몇이 밧줄을 들고 해안가 소나무에 밧줄을 매로 헤엄쳐 가는데 적군은 총을 마구 쏘았습니다. 몇은 총을 맞고 바다로 쓸려가고, 몇은 해안가로 나와서 소나무에 줄을 달았습니다. 이 줄을 타고 총을 맞으면서 학도병들은 육지로 나와야하는데 미처 다 구출되지 못한 수십 명을 산채로 배와 함께 가라앉게 놓고 무거운 발걸음들은 육지로 향하였습니다.

 

우리의 학도병들은 돌아갈 배도 없고, 뒤로는 총알과 태풍이 휘몰아쳐 목숨을 위협하던 바다요, 앞으로는 북한 최고 정규군 정예부대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격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 침몰 되었던 터라 몸은 기진맥진 하였고, 건빵은 물에 팅팅 불어터졌고, 미숫가루는 더 불어 터지고, 그 마저 3일분을 받아 안고 온 마당에 6일간 식량 공급 없이 버티며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이 헌신적이고 용감한 투지가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을 있게 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저절로 젖어옵니다.

 

육지로 나와 포항과 영천을 잇는 국도를 점거하고 싸운 이 상륙작전에서 아군 학도대원병 전사자 139명, 부상92명 , 행방불명 인원까지... 200여명의 대원들이 안타깝게 희생되었습니다만, 적군은 더 많이 죽어갔습니다. 계획한 바와 같이 그 다음 날인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인천에서 펼쳐지고,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이어집니다. 북한에서는 동쪽 바다 장사리로 주요군사력을 대폭 몰아 간 틈을 타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승리는 맥아더 장군만의 업적이 아닙니다. 손에서 교과서를 놓고, 펜을 놓고, 미처 군복이 구해지지 않은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로 총을 들고 나가서 총 8일간(전투 6일) 치열하게 전투를 해 준 10대 어린 청소년들이 승리의 총알받이가 되어 주었던 승리입니다.

 

제 아들이 올 해 중학교 3학년, 콩나물처럼 다리가 긴 청소년입니다. 한국의 10대 어머니로써 이 글을 눈물로 썼습니다.

 

지금 저의 책상 앞에 앉아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입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게 보이는 저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이 글을 눈물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바다를 지키는 해군 준위로 정년퇴임을 1년 앞둔 저의 친 남동생은 스스로 달려 가 직업군인이 되었고, 지금은 최첨단 북쪽으로 바짝 붙은 강원도 고성일대를 지키는 책임자로 북한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뿐인 그의 아들은 진해에서 무시무시한 해군특공대, 물고기 보다 더 빠르게 심해 바다를 오고 가는 초강력 훈련을 통과하고 진해를 지키고 있고, 장녀도 해군으로 입대하여 삼척에 배치 받아 직업군인의 길을 가고 있는 군인가족입니다.

 

저 바다에는 세월호와 함께 억울하게 가라앉아 버린 우리의 아들, 딸들이 있고, 또한 나라를 지키고 자유를 지켜야한다는 일념으로 사라져간 군번 없는 학도병들이 있다는 것을 가슴 따갑게 새겨봅니다.

 

미국의 한 한국전쟁연구소에서 미군 참전용사였던 에반호우의 기록이 발견 되었는데, 당시 한국전쟁에서 학생들이 전투에 참여한 인원은 3만 명이 넘지만 장사리 상륙작전에는 용맹하고 어린 학도의용군들 중심으로 독립적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던 유일한 부대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지도와 그들이 승선한 배의 손상지점 표기 등등 당시 상황에 대한 세밀한 기록이 있었기에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때 전사한 전우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찬양하고 호국충정을 기리며, 후세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고자,1980년도부터 매년 14일 이곳에서 위령제를 거행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특히 경기도 양평 청운사 "석일산" 주지스님의 도움을 받아 위령탑을 건립 제막하였습니다. 공사비 294억원을 들여서 2017년 개관예정인 장사상륙작전 기념공원이 건립됩니다. 제가 영덕군수는 아니지만, 영덕에 가시면 대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새로 생기는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공원 참배를 꼭 부탁드립니다.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703-2번지입니다. 처음엔 장사리 133번지에 있다가 옮겼습니다.

 

장사리 호국영령들에게 고개 숙여 가슴 깊이 감사드리며, 저의 자작시 한 수 바칩니다.

 

장사상륙작전참전용사들

시 /청량 이윤정

 

결코 그 희생 잊지 않으리

우리 꼭 살아서 돌아가자

우리 꼭 엄마를 다시보자

굳은 의지로 다짐해 놓고

적의 총탄을 피해 바다로

뛰어내려 배 밑에서 영영

빠져 나오질 못했구나!

 

그 누가 잊어버릴 수 있으리

단단한 우국충정심 가슴에 품고

덜 자란 몸으로 문산호에 올랐던

무탈하게 잘 다녀오겠다며

할머니 손목을 잡아 보고 나간

군번 없는 애숭이 학도병들을

 

그 누가 고개 숙이지 않으리

선배 형님들이 다 가는데

나도, 나도, 나도 가야지

너무 작고 앳된 외모 때문에

학도지원병 거절당해 울던 후배도

기어이 달려 나와

문산호에 함께 올랐었다네

 

그 숭고한 정신 잊지 않으리

적의 총알은 뱃머리까지 날아들고

마지막 구조선은 철수되어

황급히 육지로 떠나는데

산 채로 배에 남겨진

엄마를 부르던 10대 소년들

 

그 누가 잊어버릴 수 있으리

그 날 갈매기와 함께 울며

밧줄을 묶도록 몸을 내 준 해송

장사에서 장엄하게 나라를 구한

대구, 밀양에서 온 학도병들을

가슴 저린 위대한 그 이름들을.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져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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