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이는 화난 때도 소중하다. 그것이 우리가 화난 때라도 소중한 이에게는 무례한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인 것이다라는 글을 적고서는 벽 한 켠에 달았더니, 이를 본 우리 아이가 웃는다.
지금은 문구 내용이 많이 달라졌겠으나 전에는 학교에 가면 교훈 혹은 급훈이라고 해서 액자에다 “예의바른 사람이 되자”는 문구를 적어 벽에다 걸어 둔 모습을 보는 건 흔한 일이었다.
어른을 공경하고 인사성 밝은 이는 예의바른 사람으로 어딜 가나 환영받는다. 사람을 평가하는 으뜸에 예의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예의가 없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 교양 없는 사람, 버릇없는 사람, 매너 없는 사람, 생각 없이 사는 사람, 무뇌아, 무개념 등이라고 하면서 불쾌유발자로 손절하여 사람대접을 안 해 주려 한다. “그 사람 예모가 없어”라는 말이 중국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평소 예의바르다가도 어떤 힘 있는 자리에 가게 되면 갑자기 무례한 사람으로 돌변하는 이가 있다. 에베르스트는 가지 못하고 뒷산만 오르던 이에게서 보이는 행태다.
이런 이는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갑질을 하고도 그 고통이 자기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인격에 고장이 있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예의바른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 낮아지려 한다. 재물이 주어질수록 더 비우려 하며 더 겸손해지려 한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다고 높은 사람은 아니다”라는 인식을 파괴해버린다. 예의가 사람을 만들기 때문이다.
무례라는 글자를 말집에서 찾아보면 야만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래서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의 하나에 예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의를 알고 지키는 이는 문명인이요 예의를 모르는 이를 야만인이라고 부르게 된다.
우리가 실천적 지혜나 경험적 안목으로 아는 예의라는 건 지키지 않아도 처벌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키지 않을 때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방해하는 걸림돌이고, 지킬 때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조력하는 디딤돌이라 할 것이다.
관계 맺기의 디딤돌이 예의라고 해도 지나침은 금물이다. 은근무례라고 하여 행동이 지나치게 정중하고 겸손하면 외려 무례가 됨을 알아야 한다. 과례는 비례라는 말도 이를 경계한 한 말이다.
말집에서 보면, 예의를 사회생활이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이라고 적고 있다. 적어도 존경의 의미가 담기는 것을 예의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존경의 의미가 담긴 모든 말투나 태도가 다 예의인 것은 아닐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이에게 “빨리 나으시면 좋겠다”라고 말을 건넨다. 이때 휠체어 탄 이가 치료 중에 이는 환자라면, 이 말은 격려의 말로 예의바른 말투가 되겠지만, 만약 장애인이라면 무례한 말투가 되고 만다.
비록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한 말이라 해도 그렇다. 낫는다는 말은 환자에게 해당되는 말인데 환자도 아닌 장애인을 병을 앓고 있는 환자로 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상냥한 말투와 친절한 태도로 사람을 대한다 해도,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예의바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인상 좋고 친절하고 상냥하기가 곡진한 사기꾼에게 예의바른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실 예의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할 때 요구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 종래 우리의 지배적 관념이다. 교육도 그러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의가 물구나무 섰다느니 예의가 땅에 떨어졌다느니 하는 말로 아이들의 예의 없음을 나무라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어른들이 예의가 없다”는 등의 이야기는 잘 들을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연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양의 고전은 윗사람의 예의를 강조한다. 논어나 맹자도 군주의 백성에 대한 예의를 더 중요하게 지적한다. 예기의 곡례에 따르면, 예의는 어느 한 쪽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고 쌍방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윗사람이나 강자에게는 온갖 예의를 다하면서, 아랫사람이나 약자에게는 갑질하는 이를 우리는 예의바른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현금의 예의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서로가 지켜야 하는 쌍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의가 아닌 아부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 차지하고 승진하는 세태에 염증이 난다는 이가 있다. 그래서 예의를 던져 버리고 싶다고 한다. 그게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건 변태일 뿐 정상 사회의 도도한 물줄기가 아니다.
예의는 시간을 할애하고,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감내하며, 불편함을 참아내고 용기를 보태면서 때로, 금전적 손실를 감수하면서 쌓아올리는 금자탑이다. 그러나 마주 볼 때 지킨 예의로 해서 돌아 올 그 후의 유쾌함의 선순환은 금전으로 대체 불가의 힘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작금의 사회를 문명사회라고 한다. 문명사회의 구성원에게는 한층 더 높은 단계의 예의가 요구된다. 그것도 사랑을 받는 쪽이 아닌 주는 쪽에게 말이다.
두루미를 집에 초대한 여우가, 맛있는 스프를 준비하여 자기가 먹던 방식대로 납작한 접시에다, 따라 주었다는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조손가정을 방문하여 식료품을 전달하고 온 한 독지가는 받으면서도 고마워하지 않는 모습에 맥이 빠진다,고 필자에게 토로한다. 이는 주는 이의 예의가 문제되는 지점이다. 예의를 갖추었다 해도 문명국 수준에 근접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 후, 필자는 가정을 방문하여 전달할 때 기념사진을 찍지 말 것과 그 조손가정이 특정되어 외부에 드러나도록 하는 일을 삼가는 방식으로 조력을 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말을 예의 독지가에게 전해 준 적이 있다.
집이 풍족하지 못하여, 책이며 옷이며 늘 주워 온 것으로 집안을 가득 채웠지만, 자존감 높은 아이로 당당하게 자라난 자녀를 가진 한 어머니를 필자는 알고 있다. 아무리 새 것 같고 고급진 것이라고 해도, 자기 동네에서 주워오는 일은 피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존의 조건으로서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건 사랑이다. 상생의 조건으로서 먹을 것 중, 그가 원하는 걸 주는 걸 배려라 한다. 지금까지 잘 해 온 우리의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품격을 높이는 조건으로서의 예의를 요구받고 있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사랑에 배려를 올리지 않으면 사랑도 빛이 바랜다. 배려까지 보탰다고 마침표를 찍어서도 안 된다. 배려 위에 예의라는 왕관까지 올릴 때,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것이다.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상냥한 말투와 친절한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것은 기본적 예의다. 필자는 이를 제1단계의 예의라 부른다.
문명국에서 요구되는 예의는 고도의 정밀함과 세심함 그리고 민감성까지도 함께 담긴 예의라야 할 것이다. 상대의 처지나 입장까지도 헤아려 발현되는 예의가 곧, 인간의 품격을 올리는 문명사회의 예의라고 하겠다. 필자는 이를 제2단계의 예의라고 부른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는 이와 방긋 방긋 웃으면서 인사하는 기본적인 예의는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속하지만, 상대의 처지나 입장을 헤아려야지 가능해지는 예의는 마음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작품인가 한다.
바야흐로 시간은 우리에게 스케일에다 디테일까지 요구하는 시대에 와 있다. 제1단계의 예의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푸르게 믿고 있다. 마음으로 사람 보는 나이가 되면 2단계의 예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오월이다. 집 뒤, 산 가는 길에 수국이 피었다. 바람에 춤을 춘다. 산에 올랐을 때, 산보다 높은 곳에서 아카시아가 산을 지키고 있었다. 바람이 향긋하다.
전정주 경북로스쿨 교수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전정주 칼럼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