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목사]본론,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논문]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1. 로마서에서의 율법의 위치
즉, 바울은 실존주의자 루터처럼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면 용서를 얻을 수 있을까?”하는 개인적인 구원 문제로 씨름하다가 이신 칭의 교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하는 구원사적 문제와 씨름하였고, 이신 칭의 교리에서 그 해답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33)
이러한 생각을 하는 학자들은 로마서 9~11장을 로마서의 중심으로 보고자 제의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로마서가 로마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저술한 서신이기 때문에 로마서 14:1~15:13에 개진된, ‘서로 연합하라’ 는 바울의 권면이 로마서의 중심 목적을 표현한다고 보고 거기서 로마서의 주제를 찾고자 한다. 34)
본 논문은 로마서의 저술 목적과 관련하여 로마서에서의 율법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을까? 바울이 로마서를 써야만 했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오늘날 학자들 중에 로마서는 바울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그리고 독자들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평소에 다른 데서 전했던 복음을 로마교회에게 체계적으로 진술하여 보낸 편지로 보는 식의 나이브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35)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목적을 묻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로마교회 내의 문제 해결 목적이 아닌, 바울 자신의 깊은 내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 대표자들은 R. A. Lipsius, T. W. Manson, G. Klein, G. Bornkamm, J. Jervell 등이다. 또 다른 하나는 로마서 또한 다른 서신들과 같이 그 교회 안의 문제와의 대화에서 생긴 것이라는 견해이다. 36)
33) 34) 이한수, 「로마서 주석」, pp. 37-39. 35) 오성종, “율법과 복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의 ‘율법과 복음’ 문제를 위한 예비적 · 주석. 적 고찰” ,「한국신약학회 정기 학술대회」, (2007), p. 46. 36) 전경연, 「로마서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p. 23-24.
신약성서의 현대적 연구가 시작된 19세기 초에 바우르(F. C. Baur)는 바울의 로마서 저술 목적이 사도 자신의 내적 충동에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 자체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즉 로마교회 안에 교인들을 괴롭히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게 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우르는 전체 서신을 해명해 주는 열쇠를 9~10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37)
왜 사도 바울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낯선 로마교회를 위하여 가장 긴 편지를 써야만 했는가? 이에 대해 서동수는 그의 논문을 통하여 “신학적인 견해 차이를 보이는 ‘약한 자’(유대인 기독교인)와 ‘강한 자’(이방인 기독교인)로 이루어진 로마공동체가 이미 장소적으로 분리되고, 사상적으로 영구한 분열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우주적 구원사를 이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이 두 집단을 다시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시켜 보려는 교회 통합과 일치의 차원에서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38)
롬 14:1~15:13의 본문에서 로마교회는 율법 준수 문제에 대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두 그룹(유대인 신자들, 이방인 신자들) 간에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율법에 매여서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으며 특정한 날만을 거룩한 날로 지키려는 “믿음이 약한 자들”(유대인 신자들)과, 아무 음식이나 가까이 하며 특정의 거룩한 날을 지키는 율법의 관습에 매이지 않는 “강한 자들”(이방인 신자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면서 불화와 반목 가운데 있음을 본다. 39)
결국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는 그 당시 로마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 분열)였으며, 로마교회의 통합과 일치를 목적으로 한 대화의 수단으로 집필하였다고 본다. 40)
37) 전경연, 「로마서 신학」, p. 29. 38) 서동수, “왜 바울은 로마서를 써야만 했는가?”, 「호서신학」7 (2000), p. 141. 39) 오성종, “율법과 복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의 ‘율법과 복음’ 문제를 위한 예비적 · 주석 적 고찰”, p. 48. 40) 서동수, “왜 바울은 로마서를 써야만 했는가?”, p. 141.
바울은 율법에 매여 있는 유대인 신자들과 복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과 복음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롬 3:31, 10:4),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초대(롬 15:7~8)하고 있다. 바울은 여전히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며 이방인 신자들과 반목하고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율법을 중심 위치에 놓고 집중적으로 교훈함으로써,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고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걷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과 함께 로마서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복음’을 로마교회에 설명하면서 그 반대 개념인 ‘율법’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한다. ‘율법’ (novmoς)이라는 단어는 로마서에서 74회나 사용된다. 이는 바울이 사용한 전체 중(총 120회) 61.7%에 해당된다. 41)
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에서도 바울은 앞의 노모스는 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뒤의 노모스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논쟁이 끊임없는 3:31의 경우도 두 번의 노모스가 모두 (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3:19에서와 같이 구약성경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 43)
로마서에서 바울은 노모스를 첫째로 시내산 율법, 둘째로 모세 오경, 셋째로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노모스를 ‘원리’, ‘질서’ 또는 ‘법’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7:1~3에서 4회 사용된 노모스는 ‘법’ 또는 ‘관습’을 뜻하며, 7:21~8:2에 8회 쓰인 같은 헬라어 단어 역시 ‘법’ 또는 ‘원리’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44)
이외에도 바울은 노모스의 용법을 더욱 확대하여 우주적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롬 2:14).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어떤 종류건 율법을 가지지 않은 백성들은 없다고 보았다.45) 로마서에서 율법이 미치는 영역은 유대인을 넘어 온 인류에게 미치고 있다. 율법은 제한적이지 않다. 율법은 한계가 없다. 이것이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이다.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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