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목사]본론,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논문]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3. 유대인을 위한 율법
유대인들이 누린 특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율법의 수여받음이다. 로마서 9:4에 “율법을 세우신 것(hJ nomoqesiva), ‘노모데시아’ 는 ‘율법’을 뜻하는 ‘노모스’(novmoς) 와 ‘놓다’, ‘두다’, ‘세우다’, ‘만들다’ 등을 뜻하는 ‘티데미(τίqημι)’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원어의 의미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는 ‘입법’, ‘율법의 수여’ 란 의미를 나타낸다.”47) 케제만 또한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노모데시아’는 “율법의 소유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수여와 관계있다”고 밝히고 있다. 48)
46) W. 바클레이, 정혁조 역,「성서주석 시리즈 로마서」(서울: 기독교문사, 1971), p. 177.
바울의 진술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만든 율법을 수여받아 그 율법을 소유하는 특권을 누렸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다(9:31).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2:17~18에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을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라고 하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누리는 세 가지 특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특권은 ‘율법을 의지한다’(kai; ejpanapauvh/ novmw/)는 것이다. ‘에파나파우오’(ejpanapaύω) 동사는 기본적으로 ‘기대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뜻은 율법에서 자기 존재의 기초와 근거를 두고 거기에 소망을 걸며 만족을 찾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태도를 말한다. 49)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을 자랑한다’(kai; kauca'sai ejn qew'/)는 것이다. ‘자랑한다’(kaucaομαι)는 동사는 신약에서는 배타적으로 대부분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다(35회 정도). 율법을 주신 한 분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자랑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특권 중의 하나였다. 50)
세 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kai; ginwvskei" to; qevlhma)는 것이다. 헬라어 본문은 ‘뜻을 안다’고만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뜻’(qevlhma)이란 술어를 24회 사용하는데 그 중에 20회 이상을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51) 또한 문맥상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아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2:18b) 특권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지극히 선한 것’(ta; diafevronta)은 중요한 것들, 또는 본질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좋게 여긴다’(dokimavzein)로 번역된 동사는 ‘검토해 보고 좋으면 시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동사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때 사용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삶의 정황 속에서 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52)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삶에 율법은 절대적이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했고 또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했으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율법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2:17,23a).” 53)
율법의 기본 성격은 율법에서 규정하고 요구하는 것들을 지키고 행해야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과연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행위를 가졌는가? “율법은 행해야 사는 것인데(2:13), 그들은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었으므로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2:12b). 즉 바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려 했으나 그들의 이 같은 시도는 실패하였다(9:31)”는 것이다. 54)
49) 50) 51) 52) 이한수, 「로마서 주석」, pp. 230-233.
바울은 로마서 2:23에서 유대인을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는 곧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지적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의 빛으로, 열방의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이 이방의 빛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필요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온 세계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출 19:5~6). 그러나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인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율법을 자랑하였으나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되었고(2:25), 도리어 그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에서 욕되게 되었다. 결국 율법을 자랑하던 유대인은 율법으로 의에 이르는데 실패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1:18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진술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위에 임함을 말하고 있다.
본 구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학자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이는 바울이 본 구절에서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의 범죄를 염두에 두고 “1:18~32에 언급된 우상 숭배, 성적 범죄,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고 불경건하게 사는 죄 등의 범죄에 빠진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암시하거나 상기시켜 준다는 것이다.” 55)
반면에 이한수는 “바울은 범죄한 유대인들에 대한 비평을 2장에 가서 명시적으로 부각시키기 때문에 본 섹션에서 이방 세계의 타락상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한다. 56) 케제만도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1:18-32절까지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라는 제목으로 잡고, 18절은 이 단락의 주제를, 19-21절은 이방인의 죄를, 22-32절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57)
그렇다면 이방인은 어떠한가? 이방인에게도 율법이 주어졌는가?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은 행함을 전제로 지켜야만 사는 율법은 주어지지 않았다(2:14). 그러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한가?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1:18)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알게 해주는 하나님의 계시58)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1:19~20).
55) 56) 이한수, 「로마서 주석」, pp. 135-136.
1:19의 헬라어 문장 초두에 나오는 ‘이는’(διότι)이란 단어에 대해 학자들은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왜 진노를 내리시는지 그 이유를 밝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이 “진리를 억누를 만큼 진리에 대한 참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59)
후자 보다는 전자의 해석이 문맥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내 준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방인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1:18)가 임한 까닭은 이방인들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자연 계시를 통하여 보여주셨기 때문이다(1:18~19).
주목할 만한 점은 바울은 이방인들이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율법과 관련시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2:14에서 이방인이 율법이 없어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키 어려운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율법 없이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는 곧 이방인들에게 비록 문자적인 율법은 없지만, 이들도 본성을 따라 율법이 요청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한수는 “이방인들은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양심의 기능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 행동인지를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이 분별한 선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있다”고 진술한다. 60)
바울은 2:15에서 유대인들처럼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진술한다.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summarturouvsh" aujtw'n th'" suneidhvsew"), 이 부분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 양심 자체가 함께 증거하므로’, 혹은 ‘그 양심 자체가 계속해서 확인하여 주므로’ 가 된다. ‘증거가 되어’ 로 번역된 ‘쉼마르튀루세스’ 의 원형 ‘쉼마르튀레오’(summarturevw)는 ‘함께’란 뜻의 전치사 ‘쉰’(suvn)과 ‘증거하다, 확증하다, 확인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마르튀레오’(marturevw)의 합성어로서 ‘함께 증거하다’, ‘함께 확증하다’, ‘함께 확인하다’ 등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특히 본 절에서 이 단어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양심은 만물의 마땅한 이치인 도덕법을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한다. 61)
여기에서 성문화된 율법이 주어지지 않은 이방인들도 율법과 관련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도 율법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2:14). 62) 나아가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이방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고 진술한다(2:15). 그들 속에 있는 양심의 기능들은 율법의 행위가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양심(suneivdhsi")은 ‘마음’(nοu'ς) 과는 다르다. 일단 양심의 안테나에 잡힌 주장은 절대적으로 의무적이며 자신의 반응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만든다.” 63)
양심의 기능은 완성된 어떤 행동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며, 나아가 미래에 추구되어야 할 행동들까지도 내다보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양심은 타락한 인류에게 남은 하나님의 형상의 희미한 흔적으로서, 인간의 모든 행동들을 비평적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도덕적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64)
59) 60) 이한수, 「로마서 주석」, p. 144, 217.
이방인들도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총괄적으로 단언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2:20a).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은 존재이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에 도달할 자가 없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제시한 성서본문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신 것처럼 이방인에게도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판단기준으로써 양심을 주셨다고 본다.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뜻을 알 수 있는 매체로써 자연계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율법은 형태만 다를 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구원사의 선물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저작권자 ⓒ 다경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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